삼부회 소집
명사회는 제1, 제2신분인 귀족과 성직자로만 구성되었기에 면세 특권층인 이들에게 징세추징을 위한 세제 개혁안을 승인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처에서 삼부회 개최에 대한 요구가 빈번했고 1788년 8월 8일, 재무부 장관 브리엔은 국왕으로부터 삼부회 소집을 허락받았다. 8월 16일, 국고가 바닥나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다. 8월 25일, 약탈과 폭동이 빈발하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다.
네케르는 공채발행을 통해 급한 위기를 수습하였고 1788년에 명사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12월 12일 해산하였다. 1789년초가 되자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인쇄물이 늘어나고 정치토론이 활성화되었으며 여러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 삼부회에 참석할 대표 선출은 신분별로 일정한 자격과 기준으로 선정된 대의원(선거위원)들이 신분별 회의를 통해 지명,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신분별 참석 인원수는 1614년의 선례에 따라 각 신분별 동일한 인원수로 구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3신분(평민)은 지방 의회에서처럼 평민대표의 인원은 2배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이 요구를 허락하였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175년만에 삼부회를 베르사이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에서 열었다.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삼부회는 초반부터 머릿수 표결과 신분별 표결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되었다. 신분별 표결방식은 각 신분별 의결후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는데,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기득권 수호를 위해 협력하므로 대부분 2대 1이 되어 제3신분인 평민이 불리했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표결 방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면세등 각종특권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 폐지등의 개혁을 위해 합동 회의를 통한 토론을 요구했다. 기득권 유지를 원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신분별 회의 진행을 주장했다. 결국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가며 파행이 이어졌다.
테니스 코트 서약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
회의장이 폐쇄되자 1789년 6월 20일 국민의회측(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에 대해 서약문을 작성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에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바스티유 습격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자치위원회가 주도하여 바이이를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하였으며 민병대(국민군) 사령관으로 라파예트를 임명하였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철수시킨후 7월 18일에는 파리를 방문하는등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였다. 한편 혁명의 여파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격렬한 동요가 있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자치위원회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고 정치범 수용소, 요새, 성들을 장악하였다. 국왕이 임명한 지사나 군사령관들은 국민방위대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방임으로 일관했다. 이로써 국왕의 권위는 지방에서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도시들은 상호 연맹을 맺고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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