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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프랑스 혁명의 전개 - 2

by gaarchive 2024.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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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반란
농민들도 혁명에 휩쓸려 봉기하였는데 이들은 총뿐만 아니라 낫,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매우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방법들을 행동으로 옮겼다.[35] 성들을 약탈하고 자신들을 얽매었던 문서를 불살랐으며 영주와 지주들을 공격하였다. 이런 폭력적인 현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대공포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심각성을 띄었다. 삼부회나 국민의회(제헌의회)의 활동 중에 농민과 도시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발언권이 없었다. 지방도시의 봉기에서 자치위원회나 국민방위대 조직시에도 무산계급(소작농과 노동자)은 배제되었다. 혁명과 제3신분의 대표선출은 대부분이 부르주아 출신이 주도하며 무산계급의 발언권은 묵살되었다. 권리요구의 완충지대가 없이 억눌렸던 욕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제헌의회(국민의회)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며 민중과 농민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인한 무질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다. 봉건지대 유상폐지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개인적 예속의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납부 등이 기본내용이었다. 제헌의회(국민의회)의 개혁은 지속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발표하였다.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하여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세웠다. 인권선언은 자연권 사상과 계몽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미국의 독립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르사유 행진
루이 16세는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의 재가를 거부하며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켰다. 파리에는 '인민의 벗'을 비롯한 많은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고 국민의회(제헌의회)는 헌법제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스티유 습격 사건과 봉건제 폐지 등으로 놀란 귀족들은 망명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귀족들로 인해 번성했던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이 일거리가 사라지며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전년도의 기상이상으로 인한 대흉작은 밀 수확량을 급감하게 만들었고 파리의 빵값이 치솟으며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불만과 원망이 폭발 일보직전에 놓여있었다. 이런 파리의 시민들의 사정과는 달리 베르사유에서는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10월 1일 벌어졌는데 이때 군인들에 의해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색기가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은 다시 흥분하였다. 특히 이번에는 빵값 폭등으로 화가 난 여인들이 전면에 나섰다. 7천여명의 여인들이 파리 시청으로 모여들어 "빵을 달라"고 외치며 10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을 하였다. 약 20km가 넘는 이 행진에 국민방위대도 동참하였다. 갑작스럽게 베르사유 궁전앞에 몰려든 군중을 보고 당황한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하며 이들을 달랬다. 그날밤 이슬을 맞으며 노숙한 여인들은 다음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군중들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후 국왕 일가는 파리 시민들의 감시속에 튀틀리 궁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 라파예트 등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고, 1790년에는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사회 개혁 작업
파리에 거주하게 된 루이 16세는 사실상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국민의회가 발휘하였다. 자코뱅 클럽과 같은 정치 클럽이 활성화 되면서 정치활동도 활발해졌다. 1790년에 풍작으로 시위와 소요가 줄어들고 민심도 안정화된 가운데 프랑스 사회의 전반에 대해서 다양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재정적자와 50억 리브로에 가까운 부채문제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국유재산을 담보로 공채인 아시냐를 발행했다.

교회에 대한 개혁작업은 1789년 11월 2일에 성직자와 교회 재산에 대해 국유화가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수도원을 해체하고 1790년 7월 성직자 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여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를 통해 사실상 교황을 대신하여 서임권을 행사하는 등 국가가 성직자를 관리했다. 이를 위해 국민의회는 성직자 기본법의 준수에 대한 선서를 성직자들에게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교회의 일부 세력은 반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등 저항하였고 교황 비오 6세도 이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으며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다.

이 밖에도 길드(동업조합)폐지, 재판제도 등 사법부 개혁, 조세제도를 개편하였고 행정구역을 재조직하여 전국을 83개의 도와 그 하위 행정구획으로 나누었다. 재산 제한 선거제가 도입되어 일정 이상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의회의 개혁작업은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공채 아시냐는 단기간 내 재정 확보에는 기여를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경제를 악화시켰으며 종래에는 가치가 하락하였다. 의회 내 개혁파 정치세력도 분열하는 흐름이 있었다. 알자스에서는 독일 제후들과 영토분쟁이 있었고 아비뇽 그리고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특권파 인사들이 소요도 있었다. 또한 외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을 점차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망명파 프랑스 귀족들은 이런 불안감을 부풀리고 조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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