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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남유럽 프랑권 역사 프랑스 혁명

by gaarchive 2024.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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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루이 16세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자 결국 성직자, 귀족, 제3계급 등을 모은 삼부회를 열어 국난을 타개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부회의 부당한 투표 방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제3계급의 대표들이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였고,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국민의회의 대표들은 국왕이 무력을 사용하여 민중들을 탄압할 것을 우려하여 1789년 7월 14일에 절대 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이후 이날은 혁명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789년 8월 초, 국민 제헌의회는 사냥권이나 지주권과 같은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하였다. 또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인권의 기본 개념을 거의 세계 최초로 새로 시작하였다. 이 선언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 '자유, 번영, 안전, 억압에 저항할 권리'를 명시해 놓았다. 발언과 출판의 자유가 이후 허가되었으며, 임의적인 체포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특권적인 귀족 계급들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권리와 자유를 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공무원들을 출생이나 신분이 아닌, 실력과 재능으로 뽑을 것을 요구하였다.

1789년 11월, 의회는 국내에서 가장 거대한 토지 소유주였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팔아버리기로 의결하였다. 1790년 7월, 성직자기본법이 제정되어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를 재구성하였으며, 면세 특권 등의 권리들을 교회로부터 박탈하였다. 이는 국내에서 심각한 반발을 불러왔고, 몇 년 후에는 내전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루이 16세는 국민적인 지지를 어느 정도 받고 있었고, 사람들도 왕정 자체를 폐지할 생각은 없었으나 루이 16세가 국외로 도주하려 시도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왕이 외국의 침공을 빌어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국왕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주장이 점차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91년 8월,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프로이센의 왕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를 위협하였고, 절대왕정을 복구하라고 명령하였다. 1791년 9월경에는 의회에서 루이 16세에게 1791년 헌법을 인정하라고 압박하였으며, 전제군주정을 입헌군주정으로 바꾸는 데에 성공하였다. 새롭게 선출된 입법의회는 점차 파벌이 나뉘게 시작하였는데, 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적대적인 자들이 지롱드파라고 불렸으며 전쟁을 지양하는 자들을 자코뱅파라고 불렀다. 하지만 1792년에 지롱드파가 우위를 점했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국민들이 충분히 왕정 국가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1792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1792년 8월 10일, 분노한 군중들이 궁전 주위를 포위하여 루이 16세를 협박하였고, 국왕은 입법의회로 도망쳤다. 1792년 8월에는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9월 초에는 프로이센 군대가 베르됭을 점령한 것에 대하여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1,500여 명의 귀족 출신 수감자들을 죽이며 9월 학살을 일으켰다. 의회와 파리 시위원회는 시민들의 분노 앞에 무력하였고, 학살을 제지하지도 못했다. 이후 전국에서 투표가 진행되었고, 국민공회가 새로운 프랑스의 의회로 설립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0일에 입법의회를 정식으로 계승하였고, 9월 21일에는 프랑스 제1공화국을 세우며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전 국왕 루이 16세는 반역죄로 고발되었고, 결국 1793년 1월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는 이에 힘입어 1792년 11월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1793년 3월에는 스페인에도 전쟁을 선포하였다. 1793년 봄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그해 3월에는 프랑스가 마인츠 공화국을 세웠다.

1793년 3월, 성직자기본법과 군대 징집법에 반발한 벤디 지방이 파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프랑스 여러 지방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였으며, 국민공회 내부에서는 당파싸움이 격렬해지며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었다. 1793년 6월 2일에는 지롱드파들이 강제로 공회를 떠나도록 압박받았으며, 1793년 3월에 일어난 반란은 브르타뉴, 노르망디, 마르세유, 툴롱, 리옹 등 여러 대도시로 확대되었다. 파리의 국민공회는 1793년 10월과 12월 사이에 거의 1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내전이 1796년까지 지속되었으며, 대략 45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794년 2월에는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에서 노예제를 철폐하였다. 1793년 10월과 1794년 7월 사이에 국민공회에서 의원들 간의 불화는 점차 극에 달하였고, 여러 의원이 처형당하거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대외적인 전쟁은 점차 호조를 보이고 있었는데, 프랑스 군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전 유럽에 전파하였으며 빈자들과 평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뿌리며 범국민적인 지지를 얻어가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정치인들도 이에 힘입어 사람들을 가톨릭과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게 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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