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루이 16세 (1754년~1793년)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년), 미국 독립 전쟁(1775~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다. 참전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이 14세 (재위 1643~1715년)의 말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과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 · 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각지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하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하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귀족은 궁정(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결함이 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백성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 체제
구체제의 모순을 풍자한 만평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는 등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제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국가 재정 파탄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혁명(1775~83년)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 궁핍에 빠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 왕실 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1787년 2월, 재정 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 지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귀족·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 안에 저항하였고 그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 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1785년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 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도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 재판을 통해 왕비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백성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왕비의 사치가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는 오해를 퍼뜨리게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왕비는 대중에게 미운털이 박혔고 프랑스 혁명기인 1793년 10월 16일 참수형에 처하는 간접적 원인이 된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
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노동자, 빈농, 인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명사회 개최
명사회 (1787년 2월 22일)
1787년이 되자 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악화하였다. 빵의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했고 폭동과 시위가 잇달았다. 1787년 2월 22일, 루이 16세는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재무부 장관 칼론은 160년 만에 소집된 명사회에서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등 세제 개혁을 제안했다. 또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도 논의 주제로 삼았다.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명사회의 대다수는 이를 반대했다. 세제개편 안 때문에 칼론은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공금유용 등 비리가 폭로되자 1787년 4월 8일에 루이 16세는 그를 해임하였다. 칼론의 후임으로는 툴루즈 대주교인 브리엔을 임명하였다. 새로운 채권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등만 승인하고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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