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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문명의 역사 크레타에서 미케네 까지 에게 문명에게 문명은 그리스와 에게해를 중심으로 발전한 청동기 시대 문명으로, 크레타섬, 키클라데스 제도, 그리스 본토의 세 지역 문명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청동기 초기, 크레타섬에서는 미노스 문명(크레타 문명으로도 불림)이 등장했으며, 키클라데스 제도와 그리스 본토는 각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초기 헬라딕 시대에는 키클라데스 문명이 그리스 본토까지 영향을 미쳤고, 중기 미노스 시대에는 크레타섬까지 그 영향이 확산되었다. 이후 기원전 1450년경부터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에게 문명의 주도권은 본토로 옮겨갔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전설로 여겨졌던 에게 문명은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아로 지목된 소아시아 북서부에서 성채와 도시를 발견하며 실체가 확인되었다. 이후 .. 2025. 1. 17.
그리스 역사의 흐름 그리스는 유럽 최초의 고급 문명이 발달한 곳이자 서양 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기원전 3200년경 에게해의 섬들에서 시작된 키클라데스 문명, 크레타섬에서 번성한 미노스 문명(기원전 2700-1500년경), 그리고 본토의 미케네 문명(기원전 1600-1100년경)으로 이어진 이들 초기 문명은 문자를 사용했다. 미노스 문명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선형문자 A를 사용했으며, 미케네 문명은 선형문자 B로 그리스어의 가장 초기 형태를 기록했다. 또한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기록에서는 당시 그리스 본토를 중심으로 단일 국가를 이끈 "위대한 왕"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미케네 문명이 도리스인 등의 침입으로 붕괴한 이후 일정 기간 문헌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시기가 있는데, 이를 그리스 암흑기라 한다. 암흑기의 끝은.. 2025. 1. 17.
남유럽 그리스권 그리스 공화국은 남유럽의 발칸 반도 남쪽 끝에 있는 국가이다. 엘라다 또는 헬라라고도 한다. 따라서 중국식의 한자어로는 희랍(希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도 아테네는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큰 도시에 속한다. 2018년의 통계에 따르면, 대략 1070만여명이 그리스에 산다. 그리스 공화국의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파트라, 이라클리온, 라리사, 볼로스, 요안니나, 카발라, 로도스, 세레스, 코린트 등의 각 지역 도시가 있다. 남유럽의 발칸 반도 등을 바탕으로써,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의 교차점에 있는 나라로, 알바니아와는 북서 국경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는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남쪽으로까지는 튀르키예와도 접한다. 그리스 본토 동쪽에는 에게해, 서쪽에는 이오니아해가 있으며, 남쪽에는 크.. 2025. 1. 17.
프랑스대혁명 식민지 노예해방 식민지 노예해방 카리브해의 산도밍고(현재 아이티 공화국)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설탕, 커피, 코코아, 담배를 생산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당시 전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여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소식을 전해들은 50 여만명의 흑인노예와 혼혈인들이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산도밍고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흑인들은 이에 무력으로 저항했다. 1791년 8월 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흑인 노예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1개월간의 혈전으로 백인 1천명, 흑인 1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농장이 파괴되었으나 흑인들의 승리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중이던 영국이 개입.. 2024. 12. 20.
프랑스 혁명 왕정의 종말과 공화국 성립 국민공회 국경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 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다.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힘이 되었다.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끓임없.. 2024. 12. 19.
프랑스 혁명 전쟁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를 염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여 혁명정부를 압박하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각 계파간에 전쟁에 대한 계산은 달랐지만 모두 전쟁을 원했다.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코뱅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지롱드파는 전쟁을 유럽의 인민들을 해방시키 성전이라 생각했다. 루이 16세와 측근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에 군주권이 부활할 수 있는 은밀한 희망에서 전쟁을.. 2024.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