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들 중 국외 망명자가 증가함에 따라 국왕이 의지할 국내세력은 점차 약해져 갔다. 1791년 4월, 국왕과 혁명세력간에 중개자 역할을 해오던 미라보가 갑자기 사망하자, 과격한 혁명을 반대해온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는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는 프랑스인들을 실망시킨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 의회 내 내분이 생기면서 7월 15일경 루이 16세의 권한을 복위시켰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7월 17일에는 급진적인 공화정을 주장하는 코르들리에(cordeliers)라는 정치 클럽의 주도하에 민중들이 파리에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국민방위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여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샹 드 마르스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망명실패 소식을 접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왕비)와 부르봉 왕가의 신변안전과 왕권 복위를 돕고자 각국 군주들에게 파두아 회람을 돌려 프랑스의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또한 프로이센과는 동맹을 맺고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통해 국민의회를 외교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러나 필니츠 선언은 역효과를 발생시켜 파리시민들을 자극하였다. 루이 16세가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국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만 커지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충성심이 사라져 버렸다.
입법 의회
1791년 9월 3일에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1791년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을 바탕으로 그해 10월이 되어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를 통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어 새로운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입법의회에는 중도파가 340석,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가 240석, 국왕없이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130석을 차지했다. 푀양파는 주로 의사당의 우측에 앉았고 자코뱅파는 주로 죄측에 앉았는데, 이로 인해 온건한 세력은 우파, 급진적인 세력은 좌파라고 부르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장교들의 반발
군대의 모든 장교는 헌법과 의회에 새로이 맹세를 해야 했다. 모든 장교는 헌법을 수호하고 침략을 막아내며 의회의 법령에 의거한 것이 아닌 다른 명령은 따르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자필로 서명해야만 했다. 이 맹세는 군의 분열을 초래했다. 당시는 귀족가문 출신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는데 많은 장교들이 혁명을 반대하며 왕당파를 지지했고 입헌군주제를 반대했다. 결국 상당수의 장교들이 무더기로 전역을 한 후 망명귀족들과 합류해 국외로 탈출하였다.
가톨릭의 저항
프랑스 혁명의 타깃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에 극렬 저항했다. 가톨릭교회는 교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분쇄 시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내세워 반혁명 선동을 일삼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란이 방데 반란이다. 방데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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