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기
로마 제국이 크게 약화할 무렵, 골 족들은 수많은 게르만족 왕국과 수아송 왕국 등 서로마의 잔존 세력들로 나뉘었다. 이와 동시에 영국에서 도망쳐 온 켈트족들이 아르모니카 해안을 점거하고 그곳에 거주하였다. 이에 따라 아르모니카 해안의 반도가 브르타뉴로 불리게 되었으며, 켈트족의 문화가 부흥기를 맞아 인근 왕국들에게 큰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뿔뿔이 흩어진 채로 독립적으로 살고 있던 프랑크족들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워 왕을 자칭한 자는 클로비스 1세였다. 481년부터 재위하였으며, 486년에 옛 로마의 잔존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며 입지를 굳혔다. 클로비스 1세는 서고트인들과 싸울 때 기독교의 힘을 빌려 승리하였다고 선포하였고, 서고트인들에게서 프랑스 남서쪽 지방들을 탈환한 이후 508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클로비스 1세는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첫 게르만인 정복자였다. 특히 클로비스 1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단 아리우스파가 아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데, 이 덕분에 프랑스는 "교회의 장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La fille ainée de l’Église). 또한 교황에게서 '모든 프랑스 기독교인들의 왕 (Rex Christianissimu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은 로마와 골족들의 유산을 물려받아 라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다만 로마 제국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북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게르만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클로비스 1세는 파리에 수도를 두어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으나, 이 왕조는 그의 사후에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4개로 쪼개졌다. 이후 이 왕국들은 각자 약화된 채로 명맥을 이어갔고, 국왕들은 실권을 궁재들에게 빼앗겼다. 그 유력한 궁재들 중 한 명이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슬람교도들이 프랑스로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막았으며, 프랑크 왕국들 내에서 오히려 국왕보다도 신망을 얻었다. 그의 아들인 피피누스 3세가 결국 메로빙거 왕조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였으며, 직접 프랑크의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였다. 피피누스 3세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을 재통합하였으며, 서부와 중앙 유럽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카롤링거 왕조는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 하에 크게 번영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옛 서로마 제국의 관을 씌우며 신성 로마 제국을 열게 해주었으며, 프랑스는 이 때 이래로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옛 서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 노력하였으며, 영토 수복에 힘을 쏟았다. 카롤링거 왕조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 왕위에 오른 루도비쿠스 1세 때에도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루도비쿠스 1세가 죽은 이후 분열되었다. 카롤링거 왕조는 베르됭 조약 (843년)을 시작으로 후계자들의 내분으로 인하여 동프랑크(독일), 중프랑크(이탈리아), 서프랑크(프랑스)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 세 왕국들 중에서 서프랑크의 영역은 대략 현대 프랑스의 것과 비슷하며, 이 때문에 서 프랑크 왕국이 거의 현대 프랑스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9세기와 10세기경, 바이킹들이 끊임없이 프랑스를 침입해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왕권은 급추락하였다. 왕권은 가히 상징적인 수준으로 전락하였으며, 귀족들이 수없이 나타나 왕권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며, 강력한 대귀족들이 왕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곤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066년에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자신의 호칭에 추가하여, 마치 자신을 프랑스의 왕과 대등한 존재로 피력하기도 할 정도였다. 카롤링거 왕조는 파리의 백작이자 프랑스의 공작인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987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다.
중세 중후반기
카롤링거 왕조는 987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였으나, 프랑스의 공작이자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하며 그 막을 내렸다. 이후 그의 후손들인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전쟁과 정략 결혼을 통하여 프랑스의 영토들을 통합하였으며, 1190년경에 이르자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후대의 왕들은 국왕 직영지의 영토를 점차 늘려갔고, 15세기에 이르자 프랑스 본토의 대략 절반 정도, 프랑스의 북부와 중부, 서부가 국왕 직속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프랑스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변모하였으며, 철저한 계급제에 기반하여 귀족, 평민, 농노들을 차별하며 신분제를 확립하였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하여 교황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에서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수많은 기사들이 200여 년이 넘는 기간 넘게 전쟁에 꾸준하게 참여하였다. 이 때 프랑스인들이 워낙 많이 참전하였기에, 아랍인들은 십자군 기사들을 멸칭으로 프랑즈'Franj'로 불렀을 정도였다. 프랑스 십자군들은 프랑스어를 레반트 지방으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템플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에서도 다수를 점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템플 기사단의 경우, 프랑스 전역에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가에 엄청난 재정 지원을 해주곤 하였다. 다만 필리프 4세가 1307년에 기사단을 공격하였고, 우호 관계도 끊어졌다. 오늘날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는 옥시타니아 지방의 이단 종파인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은 1209년에 시작되었다.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카타리파가 제거되고 남부 프랑스의 독립이 좌절되었다.
11세기부터는 앙주를 다스리던 플랜태저넷 가문이 멘 지방과 투렌 지방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잉글랜드와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현대 프랑스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프랑스 왕국과의 대립각을 세웠다. 프랑스 왕국과 플랜태저넷 가문이 세운 앙주 제국은 백 년 가까이 서로 대립하였고, 필리프 2세가 1202년과 1214년 사이에 앙주 제국을 공격하여 영국과 일부 지방을 남기고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하며 끝을 보았다. 부빈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한 플랜태저넷 가문은 영국으로 후퇴하였으나, 이후에도 영국의 플랜태저넷 가문과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법에 의하면 프랑스 왕위는 여성이나 모계 쪽 인사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으므로, 왕위는 필리프 6세에게 내려갔다. 필리프 6세의 통치기 동안 프랑스 왕가는 중세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다만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1337년에 공격하며 빛이 바랬는데, 게다가 이때 프랑스는 흑사병이 대유행한 바로 직후였기에 공격에 더욱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백년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우세했지만 잔 다르크와 같은 지도자들의 등장 및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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