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도착한 곳을 인도라고 여겼지만, 훗날 그곳이 아시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1507년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신대륙에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하였던 스페인 왕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에 군대와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1492년 시작된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화로 아메리카의 상당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상당한 양의 은과 금이 발견되자 이웃의 포르투갈 역시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화를 시작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경쟁적으로 아메리카를 식민지화 하였고 결국 둘 사이에 큰 갈등이 벌어져 바티칸의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1494년 맺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서경 46도를 기준으로 그 보다 동쪽에 대해서는 포르투갈에 서쪽에 대해서는 스페인에 식민지 운영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어가 쓰이는 반면 브라질에서는 포르투갈어가 쓰이는 배경이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부를 가져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한편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둘 다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콘키스타 완료 이후 무슬림의 상당수와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무슬림들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거주가 인정되었는데 이들을 모리스코라고 불렀다.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무슬림의 관습과 문화까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늘 겉으로만 기독교인이고 속으로는 이슬람을 따른다는 의심을 받았고 탄압받았다. 1567년 펠리페 2세가 이들의 관습마저 용인하지 않는 법령을 선포하자 결국 모 리스코의 난이 발생하였다. 모 리스코의 난을 진압한 스페인은 이들을 모두 추방하였고 1609년부터 1614년 사이 대략 30만 명이 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1578년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포르투갈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2세가 재임하였던 스페인 왕국에 합병되었다. 동군연합이었던 이베리아 연합은 아비스 왕조의 개조인 주앙 1세가 1640년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벌일 때까지 유지 되었다. 독립 전쟁 시작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는 아비스 왕조의 방계였던 브라간사 왕가에 계승된다. 다시 독립 왕국이 된 포르투갈은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될 때까지 브라간사 왕가의 군주가 재위하였다.
1600년 무렵 이베리아반도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스페인의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11.4%이었고, 포르투갈의 경우엔 14.1%에 달했다. 이는 당시 유럽 평균 도시 인구 비중이 7.6%에 불과했다는 점과 크게 대조된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의 도시화와 견줄 수 있는 곳은 여러 도시 국가들이 있었던 이탈리아반도뿐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 이베리아반도는 사상 유래 없는 경기후퇴를 경험한다. 문제는 그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발전 원동력이었던 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은이었다. 1500년대 초부터 아메리카의 은광에서 은을 채굴하여 들여왔던 스페인은 1550년대에 42.6 톤을 수입하며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이후 양이 크게 줄기는 하였지만 1600년대에도 여전히 연간 수 톤의 은이 유입되었다. 근세 유럽 국가의 화폐는 은본위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의 공급이 늘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가격혁명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재정은 몹시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 1571년 스페인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면서 스페인의 재정은 바닥을 보였고 1585년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에서 무적함대를 잃게 되자 결국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럽의 경제 중심은 영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 지역으로 이동한다.
1704년 유럽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의 왕위는 부르봉 왕가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1931년 스페인 제1공화국 수립까지 왕위를 이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기 이후 다시 현재까지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영국은 이 전쟁에서 지브롤터를 해외 영토로 획득하여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근현대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즉위 이후 패권국 사이의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왕위를 놓고 대립하자 나폴레옹이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내세우며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였다, 이로서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이베리아반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1812년까지 계속된 반도전쟁으로 이베리아반도는 근대 화력전의 참상을 겪어야 하였다.
1823년 브라질이 독립하자 포르투갈은 정치 경제적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 사이 포르투갈을 떠나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으로 향한 이민자의 수는 2백만여 명에 이르렀다. 1910년 혁명이 일어나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경제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하였고 정치 역시 불안하였다. 이는 결국 1933년 이스타두 노부를 표방하는 군부 독재로 이어졌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독재 체제였던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민주화되었다.
한편 스페인 역시 1873년 스페인 의회의 공화국 선언에 따라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정치가 불안하였고 결국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1931년 우파에 대항하여 결성한 범좌파 연합이었던 인민전선의 선거 승리로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으로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후 그가 사망하는 1975년까지 군부 독재가 계속되었다. 군부 독재 이후 스페인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여 다시 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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