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4 프랑스 혁명 왕정의 종말과 공화국 성립 국민공회 국경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 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다.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힘이 되었다.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끓임없.. 2024. 12. 19. 프랑스 혁명 전쟁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를 염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여 혁명정부를 압박하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각 계파간에 전쟁에 대한 계산은 달랐지만 모두 전쟁을 원했다.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코뱅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지롱드파는 전쟁을 유럽의 인민들을 해방시키 성전이라 생각했다. 루이 16세와 측근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에 군주권이 부활할 수 있는 은밀한 희망에서 전쟁을.. 2024. 12. 19. 프랑스 혁명의 전개 - 3 바렌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들 중 국외 망명자가 증가함에 따라 국왕이 의지할 국내세력은 점차 약해져 갔다. 1791년 4월, 국왕과 혁명세력간에 중개자 역할을 해오던 미라보가 갑자기 사망하자, 과격한 혁명을 반대해온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는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는 프랑스인들을 실망시킨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 의회 내 내분이 생기면서 7월 15일경 루이 16.. 2024. 12. 19. 남유럽 프랑권 역사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루이 16세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자 결국 성직자, 귀족, 제3계급 등을 모은 삼부회를 열어 국난을 타개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부회의 부당한 투표 방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제3계급의 대표들이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였고,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국민의회의 대표들은 국왕이 무력을 사용하여 민중들을 탄압할 것을 우려하여 1789년 7월 14일에 절대 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이후 이날은 혁명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789년 8월 초, 국민 제헌의회는 사냥권이나 지주권과 같은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하였다. 또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인권의 기본 개념을 거의 세계 최초로 새로 시작하였다. 이 선언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 '자유,.. 2024. 12. 18.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