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럽

프랑스 혁명 왕정의 종말과 공화국 성립

by gaarchive 2024. 12. 19.
반응형

 


국민공회
국경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 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다.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힘이 되었다.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끓임없이 타협해야 했다.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160석을 차지한 지롱드파였다. 이들은 공정가격제를 거부하고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했다. 도시의 부유한 부르조아 출신인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를 폐지하였고 공화정의 출발로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로 전락한 국왕 루이 16세의 목숨을 구하려 노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선호했다.

루이 16세 처형
급진화된 혁명세력이 장악한 국민공회는 혁명의 후퇴를 막고 혁명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왕의 시신은 즉시 마들렌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왕의 무덤이 알려질 경우에 왕당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불동맹 전쟁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 · 스페인 · 사르데냐 등을 포함한 11개국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적대시하며 대불동맹을 결성하였다. 유럽의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하다는 불온한 혁명사상이 자국민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했다. 금번 제1차 대불동맹은 피트수상이 이끄는 영국이 앞장섰다. 이는 프랑스가 지난 92년 11월에 벨기에를 침공 후 합병하여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를 점령한 것이 영국의 대륙무역에 위협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군주들에 의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 혁명정부는 93년 2월 1일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제1차 대불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불동맹의 군대들도 신속히 움직여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국경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연패하자 다급해진 혁명 정부는 “30만명 모병”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왕당파가 1793년 3월 방데 반란을 일으켰고[61] 반란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

공포 정치
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6월 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7월 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 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고, 1793년 7월,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자코뱅 파는 8월 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왕당파의 반란과 대불동맹군에 대해 반격에 나섰다.

아시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농민과 상인들은 수확과 상품에 대해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가택수색과 징발이 빈발했고 밀고자들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으며 혐의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 1794년 6월에 제정된 일명 《프레리알 22일 법》으로 인해 법률조력과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와 사형, 이 두가지 판결로 축소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바리 부인,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반대파와 반혁명 혐의자들이 약식재판만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되었다. 공포정치로 인해 1년여 동안 파리에서만 30만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다.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1793년 8월 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파는 1794년 2월 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 이렇게 루이지애나, 기아나,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 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 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 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켜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년 7월 27일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 《조제프 푸셰》에서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에는 "혁명은 모든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모든 책임을 묵묵히 떠맡았던" 반면 반동 이후에는 "혁명은 부당한 일을 한 적도 있다는 것을 소심하게 인정하고 지도자들은 혁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총재 정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1795년 10월 5일 반대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통령 정부 (부르봉 왕정복고)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인해 10여년만에 단명하며 막을 내렸다.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반응형

'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유럽 그리스권  (1) 2025.01.17
프랑스대혁명 식민지 노예해방  (1) 2024.12.20
프랑스 혁명 전쟁  (2) 2024.12.19
프랑스 혁명의 전개 - 3  (0) 2024.12.19
프랑스 혁명의 전개 - 2  (1) 2024.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