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918∼1392)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였던 만큼 최고의 기량을 지닌 작가가 불화 제작에 참가했기 때문에 고려 불교의 심오한 사상이 불화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였던 고려시대에는 도성인 개경에만도 70여 개 사찰과 수많은 귀족의 원당에 봉안된 불화를 비롯하여 법회와 도량 등 불교의식에 소용된 불화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불화가 제작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불화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조선중기의 임진왜란으로 인해 약탈당하여 대부분 일본에 건너갔다.
현재 고려불화는 140여 점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일본에 있고 우리나라에도 얼마간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를 통해 보면 아미타불화·관음보살도·지장보살도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대개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제작된 불화들로 한 시기에 한정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현세의 안녕이 내세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미타 신앙에 의탁한, 권문세가의 현실적 종교관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문헌에 기록된 불화인 시왕사 시왕도, 중국 상국사 벽화를 모방한 흥왕사 벽화, 안화사 조사도와 지장왕보살도, 광통 보제사 나한보전의 석가여래·문수보살·보현보살의 삼존상 주위로 오백나한상과 오백나한도, 법왕사의 비로자나불화 좌우에 봉안된 여러 화엄조사 진영 및 운거사달마도 등을 통해 고려시대 사원의 불화의 다양한 주제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고려불화의 구도를 살펴보면, 설법도는 화면 상단에 부처님을 강조하고 하단에는 협시무리를 배열하는 상·하 2단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본존이 그려지는 상단이 강조되며 하단의 인물들이 상단을 모시는 주종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귀족과 일반 민중과의 계층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예로 노영이 그린 아미타구존도를 들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수월관음도나 오백나한도와 같은 단독상일 경우 측면관인 점이 눈길을 끈다.
고려불화의 제작기법을 보면 은은한 갈색 배경에 녹색과 붉은색을 주로 사용한 후 순금으로 윤곽선을 덧그려 매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엷게 채색하여 드러난 필선은 가늘면서 유려하고 옷주름의 끝단 등에는 구불구불한 필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또한 오백나한도와 같은 선종적(禪宗的)인 수묵계통의 인물화는 간결한 필선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
이상과 같이 대단히 치밀하고 화려한 수법으로 그려진 고려불화의 대부분은 그 화면 크기로 미루어 보아 작은 불당이나 원당에 모셔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고려후기에 해당하는 13∼14세기에 조성된 불화로 화려한 진채 및 화면의 뒷면에 칠을 하여 색채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복채, 그리고 색조의 조화로운 구성에, 찬란한 금니를 과다하게 사용하고 있어 화려한 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오교와 구산이 서로 대립해 있던 불교 교단은 1097년에 이르러 대각국사의 천태종이 첨가됨에 따라 오교구산에서 오교양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즉 구산선종)은 총칭하여 조계종이라 하고 새로 설립된 천태종을 합하여 양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태종의 개종조)인 대각국사는 화엄종 출신이며, 그 문도들은 달마구산파의 승려 중에서 응모되어 들어온 자들이다. 그러므로 천태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의 화엄사상과 달마교리를 가미·혼합하여 일종의 종지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원묘국사에 이르러 천태백련결사를 설립하였고, 이때부터 천태종에 정토사상이 혼합되었다. 그러므로 천태종은 천태, 조계, 화엄, 정토의 사가 사상이 모두 가미된 형태로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있다는 부처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스며들게 된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상종에서도 고려 인종 때 율억대사가 지리산 오대사에서 염불왕생을 추구하는 수정결사를 창립하여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정결사에는 경흥계인 신라 법상종의 미타 신앙과 만일회 같은 전통이 그대로 전승되었다고 보여진다. 만일회는 수십 년이라는 일정한 시기를 정하여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오로지 염미타에만 일념·정진하였는데, 이로써 개인적이고 단순한 정토 신앙이 아니라 규모가 확대된 미타 신앙, 다시 말해 전 불교적이며 정토만을 추구하는 전문적인 아미타 신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토교는 이처럼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독립된 종파나 학파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문헌을 통해, 특히 지눌, 보우, 나옹의 정토관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당대의 대표적 선사라는 점에서 이들의 정토관은 곧 고려시대 선가의 중심적인 정토관이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세 선사의 생존연대가 고려후기이므로 이전의 정토관을 알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눌, 보우, 나옹화상이 활동하던 시기에 수많은 아미타불화가 집중적으로 그려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는 정토종이 고려후기 귀족과 호족 사이에서 크게 신봉되었음을 알려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중국에는 현존하는 불화가 귀한 반면 고려는 불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방침으로 삼은 까닭에 매우 우수한 불화가 140여 점이나 남아 있다. 이 중 대부분이 아미타불화이며, 화기가 있는 불화들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당시의 사회상과 불교사를 보다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일본은행이 소장하고 있는 1286년의 아미타불화,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의 1306년 아미타불화 그리고 1309년에 그려진 일본 우에스기진자 소장 아미타삼존도의 화기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주자는 귀족으로 보통 첫머리에는 국왕, 궁주의 만수무강을, 다음으로는 시주자 자신의 극락왕생에의 염원, 가문의 번영, 일족의 안녕 등 현세의 영화가 내세에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1306년에 조성된 불화는 원나라로 떠난 충렬왕, 충선왕, 충선왕비 등의 삼전하가 하루빨리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불교는 전대의 이상적인 불교와는 달리,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고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소망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였음을 고려불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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