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세기에서 서기 7세기까지 약 700여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걸쳐 나타난 미술. 만주에 터전을 잡은 고구려는 중국과 화북 지방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역 및 남시베리아의 영향을 많이 수용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낙랑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또 그 고지를 점령한 관계로 낙랑 미술의 전통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남쪽으로 퍼뜨리는 중간자 역할을 하였다. 그 묘제 미술과 불교 미술은 백제, 신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건축
고구려의 건축은 도성, 궁궐, 사찰, 살림집 등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예가 없어 현재까지 알려진 궁궐터와 절터의 발굴 조사 및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건물의 그림, 문헌 기록에 따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궁궐터로는 통구의 국내성과 평양의 안학궁, 그리고 장안성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궁궐터 주변에는 전시나 유사시에 피난, 방어를 목적으로 한 산성으로 위나암산성(국내성)과 대성산성(평양)이 있었는데, 이는 도성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근년에 조사된 안학궁 터는 한 변이 623m나 되는 마름모형 성벽 안에 남북 선상으로 북궁, 중궁, 남궁과 여기에 대칭 형식으로 동궁과 서궁이 배치된 대 건축군과 정원 및 후원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남궁의 정전은 정면 57m, 측면 27m로 그 규모가 장대하다. 현재 알려진 고구려의 절터로는 평양 동북부의 청암리 사지와 대동군 원 오리사지 등이 있어 고구려의 가람 배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청암리 사지는 팔각 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의 삼면에 금당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가람 배치인데, 일본 최고의 사찰인 아스카 테라(596년 완성)의 건립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전각과 부속 건물 등을 묘사한 것이 많아서 당시 존재했던 일반 건축의 세부와 배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팔각주, 방주, 원주 등의 기둥과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 그리고 치미와 수막새 기와 장식, 인자형 대공과 동자주의 설치 등 근세까지 건조된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 유사하게 매우 발달한 건축양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평북 시중군 노남리와 북창군 대평리, 만주 집안 동대자 등에 당시의 집터가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시중군의 것은 주변에서 한 점의 기와도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민층의 주택으로 보이는데, 동서로 늘어선 네 개의 기둥구멍과 ㄱ자로 꺾인 두 개의 긴고래 온돌시설이 중요한 자료이다.
조각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구려 조각의 유품은 극히 소수로 불교 조각이 중심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승려 순도가 경문과 불상을 가지고 옴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다. 불교의 주된 예배 대상인 불상도 이미 4세기 말부터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5세기까지 그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있는 고구려의 불교 조각은 아직 없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불상 중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예는 으로 광배 뒤의 명문과 그 양식으로 보아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중국 북위나 동위 초의 불상 양식을 보이면서도 고구려 특유의 소박하고 강직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황해도 곡산군 출토의 과 평양 평천리 출토의 <금동반가사유상>이 있는데, 후자는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 초기의 예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주목된다. 또한 평양 부근의 원오리 출토의 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드럽고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6세기 말에서 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말기의 불상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는데, 이런 사실은 그 당시 도교가 국가적으로 유행되면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석조 조각으로 평양 부근 영명사지 계단 석돌에 조각된 돌사자의 예를 볼 수 있다.
회화
고구려의 회화는 현재까지 알려진 통구와 평양을 중심으로 분포된 60여기의 고분벽화로서 알 수 있다. 특히 고분벽화 내용의 주제와 화풍에 따라 시대적으로 변천된 추이를 비교적 잘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고분벽화는 묘주의 초상을 중심으로 한 풍속화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그려졌는데, 신분에 따른 인체 비례와 초보적인 요철법의 표현은 고졸한 면이 나타나면서 고구려 특유의 동적인 화풍이 드러나 있다.
황해도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은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의 귀중한 예이다. 6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중기에는 풍속도가 유행하는데, 통구의 무용총과 각저총이 이 시기에 속한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는 고구려 회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고구려 후기의 고분에는 사신도가 주로 다루어진다. 통구의 사신총, 강서대묘, 중화군 진파리 고분군, 오회분사호묘 오회분오호묘에서는 동적이며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를 띤 고구려 특유의 화풍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고구려 회화가 일본 회화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과 쇼토쿠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수장으로 고구려계의 화가들이 밑그림을 그린 , 석가모니불의 전생설화를 다룬 등의 작품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예
고구려는 석실묘의 묘제를 채택한 관계로 도굴이 많이 자행된 탓에 전해지는 부장 유물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고분벽화를 통하여 공예미술의 일면을 추정할 수 있다. 관모는 고깔처럼 생긴 모양에 꼭대기에 새깃을 단 절풍, 절풍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쓴 책왕이나 왕족이 쓴 관이 있다. 귀고리는 윗고리가 가는 세환과 태환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간 장식과 드리개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형식이다. 또한 허리띠와 띠꾸미개가 전해진다.